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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스나] Garret

공룡떡 2023. 6. 15. 18:39

[스파스나] Garret
 :다락방

1.
 비 냄새가 난다 싶으면 어김없이 네가 방문하곤 했다.
정신없이 폭탄이 터지고 피와 살점이 튀고 잘린 팔 따위가 굴러다니는 전장을 빗줄기가 씻어내기 시작하면, 하나 둘 하던 것을 멈추고 각자의 기지로 돌아갔다. 서로에게 야유와 도발을 퍼부으면서도 모두가 사라지고 나면 나는 내 방 소파에 앉아 흠뻑 젖은 모자를 걸어 말리며 짧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내었다. 그러면 얼마 후 닫힌 문 너머로 으레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방문을 두 번 두드리고 내 반응을 기다리는, 프랑스 억양이 섞인 독특한 목소리. 나는 약간은 서두르면서도 비뚤어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항상 반쯤 문을 열어 무슨 일이냐며 퉁명스레 네게 물었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담배를 입술로 자근자근 씹어내던 네 말은 언제나 같았다.

"잠시 불을 빌려주지 않겠나?"

 그 엿 같은 담배는 네 흡연실에서나 피우라며 문을 우겨 닫을 때면 너는 구둣발을 문틈에 끼우고 눈썹을 까딱였다. 네 비딱한 미소에 지고 마는 난 결국 마지못한 척을 하며 널 방으로 들이곤했다.
 
 비와 함께 불어오는 네 진한 담배 냄새와 체취가 좋아서, 아마도 자신은 비 냄새를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었다.

 그 날도 저는 평소와 다름없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기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터였다. 여전히 폭탄은 터지고 피와 살점이 날아다녔으며 점착 폭탄에 맞아 잘린 다리는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유난히 어두운 구름은 멀리서부터 한바탕 폭우를 몰고 왔으며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여성의 목소리는 짧으면서도 긴 추가 시간의 여부를 알렸다. 나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지도 못한 채 마지막으로 총알을 그들의 머리에 박아넣고 있었다. 머리가 날아가도 생명유지장치 덕분에 살아 돌아와 다시금 내게 로켓과 머신건을 퍼부어대는 그들을 막느라 숨돌릴 틈이 없었다. 한시간 사이에 벌써 저만 해도 다섯 번이 넘게 죽은 탓이었다.  

"Victory-"
 이내 숨가쁘게 몰아치던 전투의 끝을 알리는 목소리가 울리고 그제야 숨을 내쉰 제가 땀을 닦아내며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그곳엔 언제나와 같이 승리를 만끽하며 남은 적을 학살하러 다니는 동료들도, 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다니는 적들도 없었다. 모두가 침묵하며 숨죽인 가운데 다른 두 가지 색을 지닌 9명과 8명의 자들은 그저, 누워있는 누군가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다 눈을 감고는 다시 살아나지 못한 단 한 구의 시체. 그것이 여느 때와 달랐던 단 하나의 차이점이었고, 파괴와 점령을 거듭해 나갔던 오랜 싸움의 끝이었다. 
 
  그의 사인은 총알이 날아와 그의 몸에 박혔을 때 우연하게도 영원히 고장난 생명유지장치라고 했다.
 그리고 유난히 정보가 없던 그의 물건들은 우습게도 내게 주어졌다.



2.
 코끝을 맴도는 눅눅함에 스나이퍼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우울하게 눌어붙는 고향의 겨울이 오랜만인 그는 제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차갑고 습한 바람이 견디기 힘들었다.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중이었던 사슴은 자신이 낸 작은 소리에도 이미 눈치를 채 달아나고 있었다. 탄력 있는 다리는 어느새 수풀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사슴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멍하니 총을 겨누고 있다가 스코프의 렌즈를 빗방울이 두드리고나서야 스나이퍼는 저격소총을 풀어 제 옆에 있는 작은 나무 상자 위에 내려놓았다.
 -Sniper.
스코프의 옆면에 작게 새겨진 제 클래스의 이름이 낡고 녹슬어 변색되고 있었다. '먼디'는 그 음각을 엄지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스나이퍼, 부시맨, 혹은 더러운 병을 들고 다니는 놈. 저를 부르는 이름은 많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스나이퍼는 먼디라는 성으로 불려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워 스나이퍼는 한참동안 제 총을 느릿하게 매만지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 때 나무로 만들어진 제 작은 사냥용 은신처로 빗물이 새어 들어왔다. 약하게 지면을 때리던 비가 어느새 폭우로 변해 있었다. 한때 좋아했던 것만 같았던 비 냄새가 역하게 코와 목을 찔러댔다. 그는 급하게 숨을 참았다. 구역질이 올랐다. 숭고한 목적도 아름다운 이유도 없이 고용되었던 전쟁이 끝나고 저를 반긴 고향은 계절은, 싸늘한 겨울의 우기였다. 

 스나이퍼는 입을 틀어쥐었던 손을 떼고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뒤졌다. 진한 암갈색의 구겨진 우비를 꺼낸 그는 그것을 대충 꿰어 입고 총을 챙겨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는 따갑기까지 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늘은 기필코 사슴을 잡아야 했다. 


3.
아직 어린 짐승은 외발의 소음과 함께 쓰러졌다. 정확히 머리를 관통당한 그것은 쓰러져 작게 경련하고 있었다. 스나이퍼는 총을 어깨에 둘러메고 차고 있던 쿠크리를 풀어 손에 쥐었다. 뿔이 갓 돋아난 짐승은 눈을 허옇게 치떴다. 비에 젖어 미끄러지는 손잡이를 다시 한 번 단단히 쥔 스나이퍼는 미련없이 그것의 목을 끊었다. 피는 비와 섞여 그것의 눈가를 타고, 턱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그 모습을 빠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억센 빗줄기는 쓰라리게 차가웠고 또 아팠다. 피의 역한 붉은색보다 비가 더 짙게 제 색을 드러낼 무렵 스나이퍼는 문득 그를 떠올렸다.

그는,
스파이는,
붉은색의 수트와 발라클라바가
젖고, 젖고, 젖고, 젖어들어서,
흘러내리던 피가 그의 파란 눈마저 빨갛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저는 쓰러져 움직이지 않던 '그것'이 스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참아냈던 욕지기가 목구멍을 타고 번져갔다. 입안 가득 역하디역한 비 냄새가 가득 들어찼다. 스나이퍼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우웩- 욱, 우웨엑-

 속에 든 것을 게워내는 스나이퍼의 눈과 뺨을 타고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무수한 것들이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만 같은 촉감에 스나이퍼는 손으로 뺨과 입가를 거칠게 닦아냈다. 그러나 그것들은 더 지독하게 그를 파고들었다. 

 스나이퍼는 울었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사냥에 나가 목이 관통당해 죽은 토끼를 만져보았을 때보다 아이같이, 처음으로 손발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느꼈을 때보다 처절하게, 그리고 그의 장례식을 치를 때보다 서럽게 그는 울었다. 숨이 막혀 꺽꺽대면서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공포에 잠식당하는 중이었다. 또한 이해하는 중이었다. 사람 같지 않은 모양새였으나 그는 누구보다도 사람처럼 울었다. 두 손으로 눈가가 짓무를 때까지 눈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냈다. 퍼붓는 빗소리는 귓가에 울리는 이명 탓에 묻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스나이퍼는 소리를 질렀다. 엉엉 소리를 내며 흐느끼다가 땅을 손으로 쾅쾅 내리쳤다. 성대가 나가 쇠를 긁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그는 오열했다.
 
 언젠가 그와 몸을 섞고 한데 누워 손으로 장난을 치며 '만약'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보다 현실은 더 끔찍했다. 
그가 상상했던 대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지도 않았고 제가 이야기했던 대로 톱에 몸이 잘려나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스파이가 없다. 그의 목을 죄는 것은 그 사실 하나였다.

 그것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산채로 쇠가 끓는 용광로에 들어가도 이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을 거였다. 독이 혈관 하나하나를 모두 태워버려도 이 같지는 않을 터였다. 
 눈가는 따가웠고 입술은 파랬다. 몸은 벌벌 떨렸고 먹은 것 없이 위액만을 게워낸 목구멍은 아렸다. 그는 끊임없이 울고 소리쳤다.


 저는 생각보다 많이, 아주 많이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4.
 먼디의 발걸음은 나직하고 조용했다. 삐걱대는 마룻바닥을 밟는 그에게선 잔뜩 비 냄새가 났다. 그는 비옷을 벗어 대문 옆의 옷걸이에 차분하게 걸어놓았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금세 바닥에 고여 진한 색을 띠었다. 그는 거실을 한바퀴 둘러본 후 계단을 타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락을 향해 올랐다. 관리 소홀로 흠집이 잔뜩 난 거친 손잡이를 손끝으로 쓸며 그는 손가락에 느껴지는 감각을 하나하나 새겼다. 어느새 창 너머에는 구름이 개어 햇빛이 집안을 비추고 있었다.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는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손잡이에서 손가락을 뗀 그는 그 먼지들을 움켜쥐기라도 할 듯이 허공에 손을 뻗어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공기의 흐름을 타고 빛의 결정들은 날아갔다. 먼디는 미소 지었다. 퍽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아껴 계단을 오르던 그는 마침내 다락의 문을 마주하자 묘한 기분이 들어 몸을 떨었다. 입술이 부딪히며 부르르,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우스워 먼디는 웃었다. 힘겹게 뻗은 손끝에 닿은 다락의 손잡이는 따스했다. 제가 집을 떠난 이후로 다시 돌아왔던 그 날 딱 한 번 열리곤 내내 잠겨있던 손잡이는 그럼에도 작은 끼긱 소리를 내었을 뿐 매끄럽게 열렸다. 먼디는 먼지냄새가 나는 다락의 공기를 깊게 들이쉬고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제가 어릴 적부터 소중히 대해온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는 다락은 하나의 보물창고였다. 먼디는 천천히 다락을 훑어보았다. 찬장 위의 퍼즐은 저의 11살 생일에 아버지가 선물한 외계 생명체와 싸우는 히어로가 그려진 퍼즐이었고 반대편 수납장 셋째 칸의 낡고 때가 탄 토끼 인형은 12살의 이사 갈 무렵 좋아하던 옆집 소녀가 이별 선물로 준 인형이었다. 주근깨가 자잘하고 푸석한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빈말로라도 예쁘다고 할 수는 없는 소녀였다.  그럼에도 12살의 저는 순진한 그 소녀를 좋아했었다. 먼디는 떠오르는 기억에 소리 내어 웃었다. 찬장에는 그 외에도 아주 많은 것들이 있었다. 저것은 할머니께서 주셨던 오르골이며 옆의 것은 기어코 사촌 동생에게서 쟁취한 게임기였다. 지나가 버린 추억들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제 보물들을 눈으로 훑던 그는 이윽고 다른 것에 비해 먼지가 덜 쌓인 종이상자 앞에 섰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왔다. 먼디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럼에도 떨리는 손은 멈출 수 없었지만, 먼디는 천천히 상자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자꾸만 헛손질을 하여 상자의 뚜껑을 놓치기를 반복하던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간신히 연 상자의 안쪽에는 익숙한 붉은색의 발라클라바와 발리송과 시계와 담배케이스, 그리고 리볼버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 그에게 전달되었던 스파이의 물건들이었다. 먼디는 조심스레 그것들에 손가락을 대었다. 그는 차가운 금속 나이프 손잡이의 양각문양을 훑었고, 깨진 그 날 멈춰버린 시계의 유리를 훑었으며, 담배 몇 개비가 들어있는 담배케이스를 여닫았다. 꼼꼼히 그것들을 눈에 새긴 그는 발라클라바를 꺼내 두 손에 그러쥐고 천천히 그것을 코에 가져다 대었다. 천 특유의 냄새와 함께 아주 미약하게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실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스나이퍼는 그의 체취를 맡았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먼디는 감았던 눈을 뜨고 그것을 한 손에 쥔 채 마지막으로 리볼버를 들었다. 그의 물건답지 않게 싸늘하다고 먼디는 생각했다. 탄창엔 단 한 발의 총알이 남아있었고, 그는 리볼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매끈한 총은 그를 연상케 했다.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던 햇빛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먼디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발라클라바에 코를 묻은 뒤 그것을 조심스레 갈무리해 상자에 담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상자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그는 유일하게 상자에 담지 않은 리볼버에 입을 맞추었다.

"Good day to you, mate."

방아쇠는 망설임 없이 당겨졌다. 방안 가득 그가 품고 온 비냄새가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