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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스파스나] Subway -1

[스파스나] Subway -1
 :지하철

 사실 먼디는 지하철을 즐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그가 서있는 도시에 딸린 모든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자리 없이 떠돌다 우연히 정착하게 된 도시는 언제나 지저분하고 시끄러웠으며, 그건 지하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쥐와 쓰레기로 범벅이 되어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지하철은 그로 하여금 겨우 취직된 사슴 통조림 공장에 낡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게 했는데, 그가 신세지고 있는 아파트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을 정도로 먼디는 하수구 냄새나는 지하철이 역겨웠다. 그러나 그것도 특정 계절에 한정된 이야기일 뿐이었다. 호주의 겨울보다 춥고 눅눅한 도시의 겨울은 정말이지 고약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이 꽤 악바리라고 자부하고 있던 그는 이를 악물고 사흘정도 바람을 맞으며 출근했지만, 결국 독감을 앓아 죽을 뻔 하고는 적응을 포기했을 정도였다. 끙끙대며 고열에 시달리는 와중에 그는 자신이 남극에 떨어진 코알라가 아닐까 하는 꿈을 꾸기까지 했다. 이내 깨어나 자신은 그저 능력없고 가난한 이민자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냈고, 우울의 구렁텅이에 일주일 내내 빠져있었지만 결국 그는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단순히 차디찬 바람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도시의 겨울 하늘은 거의 매일 비와 눈이 섞인 토악질을 해댔다. 먼디는 하늘에 대고 가운뎃손가락을 펴고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살이 휘어져 잘 접히지 않는 접이식 우산을 억지로 우겨닫았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두운 새벽의 지하철 입구를, 그는 심호흡을 하며 내려갔다. 
 
 나쁜 의미로 날씨가 대단했음에도 역 내는 조용했다. 첫차가 다닐 시간대였고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지만 오늘은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졸고 있는 역장을 제외하고는 사람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고, 그가 그렇게 혐오하는 거대한 하수구 쥐들도 조용했다. 먼디는 제 목도리를 단단히 여미며 정기권을 밀어넣고는 플랫폼에 들어섰다. 항상 이 시간에 마주치던 엔지니어 일을 한다는 키작은 남자가 여느 때처럼 신문을 읽으며 첫차를 기다리는 모습을 기대했으나 그는 없었다. 먼디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선가 간간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려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괜스레 발을 굴러보며 초조하게 들어오는 열차를 기다렸다. 날씨가 별스러워 사람들이 늑장을 부리는 거라고 먼디는 생각했다. 영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들이로군. 그가 중얼거렸다. 먼디는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지하철이 휴업한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나 곧 열차의 접근을 알리는 사무적인 목소리와 함께 저 멀리 들어오는 열차의 불빛이 깜빡이는 것이 그의 눈에 비쳤다. 열차는 끼기긱-하는 소음을 내며 멈춰섰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열차에 올라탔다. 다행스러운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음울할 정도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텅 빈 열차 안을 둘러보았다. 꼭 자신이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톱을 든 살인마가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트루먼 쇼일지도 모르겠군. 그는 이런저런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효과가 없었고 도리어 그의 가슴을 더 서늘하게 만들었다. 기둥이 있어 기대기 좋은 좌석의 끝자리에 앉은 먼디는 부족한 잠을 채우려 노력했지만 눈은 지나치게 말똥거렸다. 먼디는 꼭 자신이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옷장에서 검은 손이 저를 확 채가지는 않을까 이불을 폭 뒤집어 쓰는 아이같은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그는 시야를 가려주는 챙이 저를 보호해주기라도 할듯이 모자를 푹 눌러썼다. 눈을 감으려고 노력하던 그는 문득 어디선가 읽은 책의 내용을 기억해냈다. 팔짱을 끼는 것은 무의식적인 자기보호 행동이라는 글이었는데, 우습게도 자신이 팔짱을 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였다. 단순히 추워서 팔을 두른 것일 수도 있잖아. 그는 애써 부정했으나 실은 더 단단히 팔을 꼬았을 뿐이었다. 먼디는 이제 두통까지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싸늘한 열차 내의 온도에 몸이 달달 떨렸지만 두통은 수면부족으로 인한 것임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하루 일과는 아주 단순하고 길었다. 새벽 첫차를 타고 공장에 도착해서 점심시간과 약간의 휴식시간을 포함한 15시간의 노동이 끝나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열 한시가 다 되었을 즈음이었고 늦은 저녁을 먹고 잠이 든다고 해도 수면 시간은 4시간이 될까 말까였다. 그래서 그는 지하철에서 매번 골아떨어지곤 했는데, 오늘은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먼디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목적지까지의 정거장 수를 세어보았다. 적어도 한 시간은 더 걸릴법한 거리였다. 그는 억지로 눈을 감고 몸을 뒤로 뉘였다.
 지하철이 몇 번 더 멈춰설 동안에도 사람은 타지 않았다.

 먼디는 누군가가 헛기침을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졸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얕은 잠인데다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으므로 개운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지 않은 것만 못했다. 억지로 일어나려고 했을 때 느껴지는 찡한 통증이 그의 머리를 울려댔다.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관자놀이를 주무를 때, 또 한 번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먼디는 내려쓴 모자의 챙을 올려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사람이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사람의 기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디는 묘하게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딘가 이상했다. 잘 다려진 정장을 입은 남자는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는 발라클라바를 쓰고 드러난 입매는 한껏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남자는 먼디와 눈이 마주치자 서늘한 푸른 눈을 반짝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상당히 이른 시간인데 어디를 가는 모양이로군. 피곤해 보이는데."

 먼디는 그의 말이 기분 나빴다. 단순히 초면의 사람에게 반말을 들어서는 아니었다. 프랑스 억양이 섞인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소름끼치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약간의 뜸을 들여 그의 반응을 기다리다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벙어리인가?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말이지."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먼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와 남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먼디는 조금씩 쿵쾅이는 제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이유없는 긴장감이자 본능적인 섬뜩함이었다. 여기 있어서는 안될 것 같다는 기분이 슬금슬금 그의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남자는 아주 가끔 눈을 깜빡였을 뿐 움직이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는 열차 문 위의 전광판을 흘긋 쳐다보았다. 막 역 하나를 지나친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채였다. 남자는 먼디의 시선을 좇았다. 

 "아... 곧 내려야하나?"
 
 먼디는 머리를 굴렸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그와 자신의 사이에 흘렀으나 먼디는 팽팽 소리가 들릴 정도로 생각을 거듭했다. 혹시 그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며 단순히 추운 날씨 때문에 얼굴을 다 가리는, 복면에 가까운 것을 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지하철 내엔 저와 남자 밖에 없었고 그는 말을 걸며 지루한 시간을 때울 사람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저를 괴롭힌 싸늘함의 근원이 저 남자라면...? 우선 먼디는 대답을 해 보기로 결정했다.

 "...당신은 곧 내리는가 보군." 
 "오, 말을 할 수 있다면 미리 말을 하지 그랬나. 생각보다 목소리도 괜찮은데."
 "그게 무슨 말이지...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내가 예의없었군. 나는 스파이라네."
 "장난 치지마."
 "이런, 그렇게 들리다니 유감이군."
 
 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아주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디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움직여야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먼디에게 이를 보이고 웃었다. 그의 품안에서는 발리송이 나왔다. 아. 이제는 도망쳐야 할 때였다. 움직여, 움직여라, 다리야 움직여....! 먼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남자는 먼디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느긋하게 허리를 숙여 그의 귓가에 입을 댔다.

 "사냥꾼 앞에서 사슴은 도망을 가야지. 자, 어서 뛰게."

 먼디는 달렸다. 마치 마녀의 성을 탈출하는 라푼젤처럼.

 "그래, 그렇게 해야 잡을 맛이 나지."

 공중에서 발리송이 번쩍거렸다. 다음 역까지 남은 시간은 3분 남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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