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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스나/메딕헤비] Bagarre

[스파스나/메딕헤비] Bagarre
 :난장판

 #1.
 스파이는, 제가 여지껏 살면서 이렇게 놀랐던 적이 있던가 싶었다. 저는 나름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해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려고 다짐했던 스파이는 잠시동안 제 이성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고, 제 흡연실 바닥을 내려다보아도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막혀있어야 할 곳이 없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2.
 스파이는 담배를 질근거렸다. 자못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실은 끓어오르는 속을 다스리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 앞의 낮은 탁자를 뺀질거리는 의사의 면상에 뒤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고난 연기자처럼 편안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미처 억누르지 못한 짜증은 발리송을 타고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찰칵, 찰칵 규칙적으로 여닫히는 차가운 금속의 울음소리는 적막만이 가득한 방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둘러 앉은 네 사람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고, 그들 중 두 사람은 반라였으며 한 사람은 전라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진지한 토론이나 회의 중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먼저 그 소름이 끼칠 것만 같은 정적을 깬 것은 의외로 스나이퍼였다. 유일하게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그는 팔걸이에 기댄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해보지 그러나, 메딕."

스나이퍼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답하기 전에 우선 옷은 좀 입어줬으면 좋겠군. 그... 덜렁거리는 게 딱히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라서 말이야."

고개를 내젓는 제 연인의 옆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본 후 스파이는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메딕을 쏘아봤다. 발리송은 접어 수트 안쪽의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손등을 위로 하고 손을 까닥거리며 그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게 자랑하고 다닐만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얼굴엔 쓸데없는 자신감이 가득하군."

빈정거림이 잔뜩 들어간 어투였다. 눈썹을 팔자로 뉘이고 웃고 있던 메딕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오, 이런 스파이. 의사로서 작은 팁을 하나 주자면 남자의 그곳은 약간 서늘해야 좋다네."
"그쪽은 서늘하다 못해 곧 얼어 쪼그라들기 일보 직전 같은데."
"아무리 쪼그라들어도 만족시킬 수는 있지, 자네의 그 감춰진 건지 보이지 않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 것보다는 말이야."

두 사람은 조용히 이를 갈았다. 마주한 눈에서 불꽃이 튈 것 같았다. 정말로 빠지직-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고 스나이퍼는 생각했다. 그는 메딕과 스파이를 한 번씩 쳐다본 후 제 반대편의 헤비를 바라보았다. 양손을 곱게 모아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스나이퍼는 약간 짜증이 치솟았던 마음이 누그러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숙인 그의 고개에서 침이 주륵, 하고 흘러 떨어지기 전까지는.

"...헤비. 잘 거라면 빨리 이 상황을 수습하고 방으로 돌아가서 자란 말이 내 입에서 꼭 나와야겠나."
선글라스 안의 퀭한 두 눈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빛을 띠었다.

"왜 우리 헤비 기를 죽이고 그러나, 사람이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지."
"넌 좀 닥쳐줘."
"그렇게 말하면 상처받는다네, 스나이퍼. 내가 매일 밤 헤비를 제대로 재우지 못한 잘못이 크니 욕을 하려면 내게 하게. 헌데 그러는 자네는 아주 멀쩡해 보이는 게 밤마다 숙면을 취하나 보군."

팀 닥터로서 아주 안심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어. 메딕은 덧붙이며 웃었다.

"아, 그 시원찮은 좆을 받아내느라 헤비 안색이 그렇게 매일같이 썩어있던거군."

스파이가 으르렁거렸다.

"시원찮은지 아닌지는 자네가 받아보고 판단해보지 그러나?"
"딱 보기에도 부실한 게 자네 목소리처럼 토끼 같겠군."

메딕의 콧잔등이 씰룩거렸다. 그는 중지를 세워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렸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언젠가 그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었지."
"마찬가질세."

상체를 깊게 숙인 채 얼굴을 마주한 둘은 이제 거의 의자에서 뛰쳐 나갈 지경이었다.

"그만...!"

둘이 각자의 멱살을 틀어쥐기 전에 스나이퍼가 소리쳤다.

"둘 다 입 다물지 않으면 내 밴의 병들에 그 알량한 입들을 쑤셔 넣고 뚜껑을 닫아 절여버리겠어."

천장이 무너진 방에 다시 고요가 찾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메딕과 스파이는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고, 아까의 정적과 다른 점은 헤비가 이제 작게 코까지 골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제발 나잇값 좀 하고 살게. 메딕은 옷을 입든가 일이 이 지경까지 온 원인을 설명하든가 둘 중 하나를 빨리 해줬으면 좋겠고 스파이, 자네는 셔츠 단추 좀 여며."
"원인을 설명하라니,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우린 정말이지 아주 평범하게... 물고 핥고 빨고 있었단 말일세."
"도대체 어떻게 물고 핥고 빨았길래 천장이 무너지느냔 말이야."
"그걸 안다면 내가 의사를 때려치우고 건축가를 하고 있겠지, 스파이. 자네는 가끔 너무 당연한 걸 물어보는 경향이 있어."
"그리고 언젠가 내가 네 등짝에 칼을 박아넣으리란 것도 당연하지."
"벌써 두근대는구먼."

쾅-!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이 공기에 흘렀다. 테이블 위에서 하얗게 색이 바랠 정도로 꽉 쥔 주먹이 흔들렸다. 스나이퍼는 그의 네모나고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둘의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음은 놀랄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렇게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침묵이 그들에겐 더 무섭게 느껴졌다.

"자, 마저 이야기를 계속 해보지."
주먹을 풀어 제 무릎 위에 손깍지를 낀 스나이퍼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메딕과 헤비가 신명 나게 떡을 치고 있었는데 천장이 무너졌다, 이거군." 
메딕이 침을 삼켰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한창 스파이와 내가 분위기 좋을 때에 천장이 무너졌고."

스파이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지나치게 투명한 푸른색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반쯤 벗은 헤비와 홀딱 벗은 메딕이 거기서부터 떨어졌고."

헤비는 이제 고개를 젖힌 채로 그릉 거렸다.
 
"...분위기 좋았었는데."

스나이퍼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미 무너진 건 어쩔 수 없고, 내일 날이 밝으면 사람을 부르던가 해. 나는 피곤해서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군."

그는 선글라스를 벗어 다리를 접은 후 조끼 가슴 부근의 주머니에 꽂았다. 드러난 눈 밑은 정말로 구두약을 바른 것 같았다. 스파이는 그런 제 연인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스나이퍼는 그런 그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후 제 물건들을 챙겨 일어섰다. 스파이는 으음, 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고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무시당한 시선을 돌려 메딕을 노려보았다. 그리곤 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벙긋거려 한 글자씩 내뱉었다.

'이제 내 방에서 꺼져.'

메딕은 미간을 찌푸렸으나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헤비를 깨우는 쪽을 택했다. 그는 손을 들어 헤비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헤비, 일어나게."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가 한 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가도 깨지 않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를 업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하고 메딕은 생각했다. 그는 헤비를 흔들어 깨우는 방법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헤비의 귓가에 작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헤비는 눈을 떴다. 스파이는 그 모습을 놀랍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적어도 제가 알기에 헤비가 스스로 깨기 전까지 그를 깨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메딕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헤비와 함께 일어섰다. 그리곤 스파이를 한 번 내려다본 후 혀를 차고 방을 나섰다. 헤비는 반쯤 감긴 눈으로 메딕을 향해 말했다.

"...샌드비치?"

#3.
 스파이는 조용히 스나이퍼의 밴 문을 두들겼다. 밴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스파이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셔츠의 맨 윗단추를 풀었다. 어차피 풀 것을 여미라고 한 것은 감정 표현이 크지 않은 그의 작은 질투였겠지. 그리고 스파이가 예상한 대로, 밴의 문은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날 날이 밝도록 밴이 흔들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메딕의 랩에서도 꺼지지 않고 불빛이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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