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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데샹바레] Cigarette

[데샹바레] Cigarette
 :담배

 퍽-
공기를 찢을 것만 같은 소리는 그 날카로움을 자랑이라도 하듯 품고 있던 술과 함께 흩어졌다. 독한 위스키의 향기는 그들에게 익숙한 피 냄새를 가리며 흐릿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까미유는 깨진 위스키 병의 잔해를 흘긋 쳐다보고는 미련없이 깨진 병의 입구를 쥔 손을 풀었다. 유리병은 바닥에 깔린 두꺼운 융단으로 떨어져 구르지도 깨지지도 못한 채 어설프게 남은 위스키를 토해냈다. 히카르도는 잠시 금 멍하니 그 모습을 응시했다.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흩뜨리자 유리 부스러기가 잔별처럼 쏟아졌다. 이마와 맞닿은 손가락 끝이 축축하고 따끔거렸다. 히카르도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눌러 담았다. 제 앞에서 비틀거리다 머리를 내리친 사람이 제가 유일하게 성질을 죽이는 상대인 까미유이기 때문이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남아있는 잔해들을 털어내리는 그를 보며 까미유는 웃었다. 차가운 울림을 지닌 명백한 조소였다.

"알코올이니까 적어도 소독은 확실하겠네."
 
 악의가 가득 담긴 말을 내뱉으며 까미유는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는 히카르도를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은 꼭 순진한 천사처럼 보였다.

"농담이야. 좀 웃지그래?"

 재미없어? 꽤 좋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어깨를 들썩이며 킥킥대는 까미유를 바라보며 히카르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취한 그를 건드린 것이 잘못이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인간이었고 타인에게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므로 그가 취해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히카르도는 턱을 흘러내리는 끈적한 것들을 손으로 대충 닦아내며 주머니를 뒤졌으나 잡히는 것은 없었다. 창백하게 푸른 빛을 띤 투박하고 핏줄이 솟은 손이 주머니에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자 히카르도는 피와 알코올을 닦아낼 만한 것을 찾았다. 까미유는 그런 그를 보며 마저 웃다가 제 수트의 주머니에 꽂힌 손수건을 던졌다. 바닥에 닿기 직전에 가까스로 손수건을 낚아챈 히카르도는 그를 보며 눈썹을 까딱였다.

"미안하게 됐어, 갑자기 어깨를 두드리니 내 목을 따라고 로즈가 보낸 킬러인 줄 알았거든."
나름 괜찮은 스트리퍼인데 질투가 강해서 말이지. 노파든 꼬마든 여자가 나한테 말만 걸었다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죽일듯이 따지고 든다니까? 언젠가는 킬러를 보낼 것만 같아서 말이지. 혀가 꼬여 부정확한 발음을 내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취한 사람의 주정같았지만 히카르도는 갑작스레 묘한 기분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사실 난 오늘 집에 들어올 생각이 없었거든. 오늘따라 유독 진탕 마시고 싶었단 말이야. 근데 내가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와 있는지 알아?"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히카르도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찍어내며 눈썹을 까딱였다. 계속 이야기 해보라는 의미였다.

"새로 산 드레스 좀 봐달라며 로즈가 가슴이 잔뜩 파인 드레스를 자랑하기 시작하는데 대충 주물러주며 맞장구 치고 있었거든. 그랬더니 그 년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군."

까미유는 이야기를 하다말고 품을 뒤져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잔뜩 낡아 볼품없는 담배케이스는 이음매가 낡아 여닫을 때마다 끼긱 소리를 냈다. 히카르도는 아주 예전 제가 처음으로 그에게 준 선물을 지금 당장에라도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감각은 이미 목덜미를 침범하고 저를 완전히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잔뜩 어른 흉내를 내며 골목을 쏘다녔을 때 진짜 어른 같은 기분을 느끼고자 선물한 담배케이스였으나 지금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울렁거리는 기분을 얼마 만에 느낀 건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초조하게 침을 삼키는 소리가 방안 가득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런 히카르도를 놀리기라도 하듯 까미유는 자꾸만 손에 쥔 라이터를 놓쳤다. 젠장.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라이터의 부싯돌을 헛돌리던 까미유는 몇 번의 시도 끝에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래서?"

히카르도는 재촉했다. 그런 그를 보며 까미유는 미소 지었다. 예쁘게 잡힌 보조개가 선명하게 파여들었다.

"네 얘기를 하더라고. 같잖게 아양 떠는 목소리로 네 얘기를 시작하는 거야."
"뭐라고 했지?"
"글쎄 그 년이 네가 나랑 섹스하고 싶어하는 것 같대. 우습지?"
"...그게 무슨 소리지?"

까미유는 소리 내서 웃었다. 물었던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며 우스워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은 까미유는 눈물까지 흘릴 지경이었다.

"로즈가 눈치 하나는 밝거든. 눈치 없인 밥벌어먹기 힘든 곳에서 일하니 그런가 하지마는 가끔 귀신같이 날카롭단 말이야. 근데 글쎄 그년이 노망이 났는지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더라고. '네 옆에 항상 졸졸 붙어 다니던 남자, 이름이 뭐더라... 바레타인지 하는 남자, 나 그 사람 싫어'라면서 칭얼대길래 왜냐고 물어봤지. 내 오랜 친구가 싫다니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겠어? 그랬더니 친구냐며 반문하더란 말야."

까미유는 웃느라 거칠어졌던 숨을 고르며 담배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날 바라보는 네 눈에 항상 욕정이 드글드글하길래 친구인 줄 몰랐다고 하더라고. 정말 우습지 않아? 그년도 이제 맛이 간 모양이지."

잔뜩 휘어진 까미유의 눈꼬리를 응시하며 히카르도는 저를 짓눌렀던 불안감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자신을 응시하는 선글라스 너머의 초록빛 눈이 차가웠다.

"네가 나와 자고 싶어 할 리가 없잖아? 아니야? 그래?"

까미유는 언제 취했냐는 듯 반듯한 걸음걸이로 히카르도의 앞에 다가섰다. 항상 마주하고 자랐던 죽마고우의 눈은 그보다도 자신이 더 잘 알 터였다. 까미유는 깊게 담배를 빨았다. 홀쭉하게 패인 뺨 가득 연기가 들어찼다. 까미유는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얼굴에 천천히 담배연기를 뱉었다. 미지근한 회색의 연막은 히카르도의 시야를 가렸고, 그는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손끝의 날카로운 부분이 저릿저릿했다. 미약하게 떨리는 그의 손을 감싸 쥐고 깍지를 껴 넣으며 까미유는 담배를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비벼껐다. 쓸데없이 큰 그에게 맞추고자 까치발을 들고 그는 히카르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나만 너랑 자고 싶은 줄 알았거든."

까미유는 천사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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