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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사이먼X키어런] Cave

[사이렌/사이먼X키어런] Cave

 
 *인더플 시즌1,2 스포 존재합니다*
 *시즌2 피날레로부터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설정입니다.*
 

 #
 "나와 함께 갈 곳이 있어, 사이먼."

 꽤나 담담하다고 할 수 있는 어조였다. 그러나 사이먼은 어째선지 그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서늘한 무언가가 가슴 한복판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피할 수 없었다. 저와 시선을 한 번 맞추고 바닥을 보며 머쓱하게 눈을 굴리는 키어런은 분명 평소와는 다른 점이 있었고, 그 미묘한 차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는 없었으나 사이먼은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보다는 걱정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어디를?"

 창밖으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데다 유난히 바람이 강한 날이었기에 '나가자'는 말이 우습게 들릴 정도였으나, 사이먼은 진지하게 되물었다. 사실 자신들에게 그런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으니 언뜻 보면 도리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키어런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가보면 알아. 당신도 가본 적 있는 장소니까."
 
 내가 그와 가본 장소? 사이먼은 빠르게 기억을 뒤적였다. 마을회관, 병원, 혹은 그와 함께 걸었던 거리들. 그와 함께했던 곳은 언제나 특별했으나 따로 들를 만한 곳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어렴풋하게 떠오를 것 같은 기억이 있었지만 그저 형체 없이 흐릿한 파편이었다. 사이먼은 손을 뻗어 키어런의 손등을 쥐었다. 그러나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같은 농담 섞인 말을 던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기분의 문제이기도 했고 상황의 문제이기도 했다. 잠시 동안 서로와 눈을 맞춘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여전히 손은 맞닿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
 굳이 우산을 쓰지 않아도 그들에게는 딱히 해가 될 것이 없었으나 옷이 젖는 것은 별개였다. 그 누구라도 물에 잔뜩 젖은 옷을 달가워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사이먼은 우산꽂이에서 가장 커다란 우산을 굳이 하나만 꺼내 들었는데, 그 모습에 키어런은 슬쩍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큰 우산이라 할지라도 성인 남자 두 명이 들어가기엔 형편없이 작은 크기였다. 그렇지만 그는 부득불 하나를 고집했다. 어깨가 젖을 것이 확실했지만 역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먼은 가끔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비가 오는 것은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 갈까?"

 사이먼의 목소리가 너무나 따뜻해서 키어런은 제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분명 눈물이 고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도 단단한 자신은 아니었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저는 익힌 무나 감자처럼 물렁해졌다. 꼭 손가락으로 누르면 옴폭 패인 자국이 남을 것처럼. 손바닥을 내밀어 느껴지지 않는 빗방울을 오목하게 담아내는 키어런을 바라보다가 사이먼은 우산의 버튼을 눌렀다. 새까만 검은 색의 우산 안쪽엔 고흐의 그림이 가득했다. 그 색감이 마치 제 연인의 머리카락 빛깔을 닮았다고 생각하며 사이먼은 발을 내디뎠다. 정확히 같은 키어런과 같은 타이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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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어런은 발바닥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찰박이는 소리가 좋았다. 사실 비가 오는 날은 키어런이 가장 좋아하는 날씨이기도 했다. 그저 제 방안에 앉아 온 세상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붓을 움직이는 것은 그에게 큰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방에 걸린 대부분의 그림들, 그가 특히나 좋아하는 그림들 대부분은 비가 오는 날에 그려진 것들일 정도로 키어런은 그 섬세한 눅눅함을 아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에 외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몸 상태에 우습게도 약간의 다행마저 느꼈다. 자신이 좀비가 된 것에 그러한 감정을 느낄 정도가 된 것은 그에겐 어색할 정도로 커다란 변화였다. 자신은 사이먼을 만나고서부터 많은 것이 변해가고 있었다. 원하는 쪽으로든 원하지 않는 쪽으로든 그와 함께하는 매일은 항상 거대한 쓰나미처럼, 혹은 몽글 거리는 거품 덩어리처럼 그를 덮쳤다. 키어런은 고개를 들어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사이먼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좋은 쪽으로의 변화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꼼꼼하게 그의 모습을 눈에 새겼다. 언제나 단정하게 넘긴 머리카락이 눅눅해져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는 점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오래된 먼지 같은 빛을 띠는 구름과 고흐의 그림 밑의 사이먼은 찬란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항상 '너는 빛이 난다.'라고 말하지만 반짝이는 쪽은 오히려 그라고 키어런은 생각했다. 매번 그를 그리려고 시도했을 때마다 몇 번이고 붓을 내려놨을 정도로, 그는 대단했다.
 사이먼은 제게 닿는 시선에 눈썹을 까닥였다.

 "무슨 문제라도?"
 "...문제는 항상 있잖아."
 "그런 부차적인 것 말고."
 "아무것도 없어요, 비 오는 날에 산행을 해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산에 가는 거야?"
 ".....아차."

 사이먼은 도대체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산. 산에 볼 것이 뭐가 있지? 사이먼은 애써 눌러두었던 불안감에 두려움까지 섞여드는 기분이었다.

 "나를 묻으러 가기라도 하는 건가?"

 농담이랍시고 꺼낸 말이었지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키어런의 시선에 사이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그저 우산을 키어런 쪽으로 기울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을은 섬세하지만 축축하게 그들을 감쌌다. 비에 젖은 땅의 내음이 짙어질 때 즈음에서야 키어런은 누가 제 심장을 손으로 조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산책로는, 그리 멀지 않았다. 


 #
 사이먼은 숲이 어색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이 장소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 그가 로튼에 왔을 때부터, 이 숲에 들어오기만 대부분은 그닥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질척이고 꿉꿉한 숲의 공기는 끈적할 정도로 그들에게 엉겨붙었다. 그 서늘한 바람 때문에 그들의 코와 입에선 하얀 김이 새어나왔다. 그것을 흥미롭게 관찰하던 키어런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몸은 죽었는데 숨은 쉬고 있다는 것이 우스웠다.
 에이미가 죽고, 자신이 이곳에 남기로 결정했던 그때부터 이따금 조용히 제 마음속에서 회오리치는 것들이 있었다. 가끔은 숨을 참기 힘들 정도로 가빠올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이 숲을 떠올렸다. 그 생각의 실타래엔 '오늘'도 엉켜있었다. 나는 언제나 이곳으로 실타래를 끊어내러 오는구나.


 이미 떨어져 썩어가는 낙엽과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버석거렸다. 하늘을 가릴 듯이 뻗은 나무들은 어느새 옅어져 가고 있었고, 갈색과 짙은 녹색과 회색빛 하늘 가운데 오직 사이먼의 눈만이 투명하게 빛이 났다. 키어런은 굳이 그의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꼽으라면 아마도 눈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푸른빛을 띠는 회색의 구체는 마치 거울 같아서, 사이먼의 눈동자가 저를 한가득 담아낼 때면 키어런은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사이먼 또한 마찬가지였다. 키어런의 눈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물론 그가 '살아'있었을 때의 갈색 눈동자도 분명 따뜻하고 아름다웠을 테지만, 그는 지금의 키어런이 더 사랑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온전히 동그란 홍채에 서늘한 푸른빛을 띠는 자신의 눈과는 달리 키어런의 눈은 꼭 옅은 색들이 뒤섞인 종이에 떨어져 번진 검은 물방울 같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보며 몸을 떨었다. 무엇보다 짙은 공간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
 -BEWARE ROTTERS
악의가 가득 담긴 비방은 언제나 키어런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여기야?"

 사이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분명 와본 적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닥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장소는 아니었다. 우선 자신의 미간에 주름을 새기는 저 불쾌한 낙서부터가 그랬다. 그는 어째서 키어런이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는 재촉하지 않았는데, 키어런은 그런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자, 들어가자."

 둘은 어둠 속으로 몸을 굽혔다.

 동굴은 상당히 좁아서 무릎을 굽혀 끌어모았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발이 얽힐 정도였다. 불규칙하게, 그러나 아늑하게 녹아내린 초에 키어런은 조심스레 불을 붙였다. 중첩되고 반사되는 촛불은 창백한 둘의 피부를 한층 인간다워 보이게 했다. 사이먼은 동굴 벽 곳곳의 낙서를 한 글자씩 읽어나갔다. 릭-. 낯익은 이름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가 짜증이 날 정도로 곱씹은 이름이기도 했다. 키어런은 자신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존재가 사뭇 선명하게 다가왔을 정도로 그 이름이 사이먼에게 작용하는 바는 컸다. '제 애인의 전 연인, 혹은 그에 준하는 관계였으며 자신이 모르는 키어런의 과거를 알고 있고 그의 삶을 앗아간 존재'. 릭은 사이먼에게 그런 이름이었다. 유치하게도 자신은 질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느냐마는 동굴 곳곳에 보이는 그 이름들이 그에게 주는 감정적인 동요는 꽤나 컸다. 그건 키어런의 방에 드문드문 보이는 초상화나 편지뭉치보다도 그가 모르는 과거를 좀 더 강렬하게 비춰주는 것 같았다. 사이먼은 키어런과 무릎을 맞대고 있는 이 장소가 약간은 부담스러워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래, 자신은 삐쳐있었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옅은 그의 눈이 빛에 일렁였다.

 키어런은 그의 시선을 좇아 동굴 내부를 스윽 훑었다. 울퉁불퉁한 바위벽에 삐뚜름하게 적힌 낙서들, 이름들, 크고 작은 기억들. 키어런은 새삼스레 신기해졌다. 릭이 다시 찾은 삶을 잃어버리고 나서 자신은 단 한 번도 이 동굴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 발을 들이기 바로 전까지도 자신이 눈물을 펑펑 흘려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전에 없이 편안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릭과 있을 때도 마음 한구석엔 걱정이 끼어 있었는데. 문득 키어런의 눈에 검붉은 얼룩이 띄었다. 제 손끝이 닿는 높이와 정확히 일치하는 얼룩이었다. 흙먼지에 흐려지긴 했지만 분명히 이질적인 감각을 주는 그 색을 바라보며 키어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은, 이 동굴은, 내가 죽은 곳이야."

 사이먼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키어런은 핏자국을 나직하게 쓸어내며 지긋하게, 그러나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릭을 알게 되고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발견한 곳이기도 하고.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나와 그는 독특한 관계였어."

 '독특한'. 키어런은 신중하게 말을 골라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먼은 오래전에 멈춘 심장이 콕콕 쑤시는 기분이 들었다.

 "실은 특별한 관계였지. 그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싫어했어. 내가 그에게 믹스 CD를 구워줬거든. 그는 그게 자기 아들을 반항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나 봐. 어쩌면 그건 그냥 핑계고 나 자체를 꼴도 보기 싫어했을 수도 있지. 사실 이쪽이 더 맞는 것 같아."

 키어런은 작게 웃었다. 그러나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는 아니었다.

 "우리는 빌의 눈을 피해서 릭과 둘만 있을 장소를 찾았어. 정말 온 동네를 쏘다녔지. 그렇게 발견한 곳이 여기야...참 아늑하지? 이곳을 발견한 우리는 꼭 소설의 주인공 같은 기분도 느꼈어. 나와 릭은 여기에 굉장히 자주 왔고, 그건 그가 군대로 떠나가기 전날에도 마찬가지였지. 내가 이곳에 혼자 온 적은 딱 한 번 밖엔 없었어. 그리고 그게, 내가 죽은 날이야."

 그는 팔을 걷어올려 제 손목에 난 상처를 드러냈다. 선명하게 난 세로줄은 아주 깊었다. 그게 꼭 그와 키어런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 같아서 사이먼은 입술을 꼭 닫았다.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항상 자기 상처를 드러내기를 꺼렸다. 자세한 것까지 에이미에게 모두 전해 들을 것은 아니었기에 사이먼은 그저 그가 제 상처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라고 짐작했으나 이제는 그 행동이 그와의 추억을 그저 저만 품고 싶어서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불편하지? 굳이 이곳까지 데려와야 할 필요가 있나 싶고."

 키어런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미소 지었다. 약간의 한숨을 덧붙인 그는 입꼬리를 조금 더 당겨 웃으며 사이먼의 뺨에 손을 올렸다.

 "나는, 이곳에 당신을 데려오기로 마음먹기까지, 아주 많은 고민을 했어. 분명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나한테도 불유쾌한 기억들이 불쑥 튀어나올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키어런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손끝에 닿는 감각은 여전히 밋밋했다. 그렇기에 그는 제 손가락이 그리는 궤도를 정확하게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당신이 몰랐던 내 이야기를 모두 알기를 원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 이건 나도 마찬가지고. 나는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당신은 내 부모님도, 여동생도, 사는 곳도 알지만 난 당신이 언데드 선지자의 제자였다는 것밖엔 모르니까. 하지만 이건 당신이 원할 때 천천히 이야기해줘. 그럴 준비가 되었을 때에."

 사이먼은 문득 그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이 일으킨 반사작용이었겠지만 사이먼은 그와 반대쪽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쌌다.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그의 눈가를 훑어낸 사이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먼, 나는 당신을 만나면서 정말로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어. 그 변화가 너무나도 빠르고 선연하게 다가와서 가끔은 철렁하기까지 할 정도야. 내가 죽기 전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이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이 된 것 같아... 모래가 한 덩이씩 패여나갈 때마다 그 자리엔 당신이 서려 있어. 물론 우리 모두가 바뀌었지.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바뀐다는데 우리는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했잖아?

 둘은 작게 웃었다. 좁은 동굴이 증폭시킨 웃음소리가 사그라들 무렵 어느새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뺨에 댄 손가락이 서로의 눈을, 코를, 입술을 매만졌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애틋한 제 연인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겪었고 또 쓰라렸다. 무언가를 얻었지만 그만큼 잃기도 했다. 분명 완벽한 관계는 아니었다. 애초에 서로가 부족했던 만큼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적이 없을 수가 없었다. 둘은 키스했다. 그것만큼 저희들에게 분명한 것은 없었으므로. 둘은 서로의 눈에서 서로를 보았다. 촉각이 사라져 눈을 뜨고 키스해야 한다는 것은 도리어 더 많은 감정을 섞이게 했다. 허공에서 얽혀드는 시선은 숨이 막힐 정도로 빽빽하게 감각에 들어찼다.

 키어런은 비로소 그때서야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처음으로, 그는 억지로 끊어내지 않는 법을 배웠다.


 #
 항상 가는 길보다 오는 길이 더 짧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동굴에서의 시간은 짧게 느껴졌으나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갈 정도였다. 키어런은 나무들 사이로 흐릿하게 떠오른 초저녁달에 눈길을 주었다. 반짝이는 노란빛 대신 흰 푸른빛을 띠는 달은 꼭 사이먼의 눈을 연상케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늘이 전에 없이 아름다워 보여서, 키어런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소소한 것들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젬이 지금보다 어렸을 적에 읽었던 할리퀸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유치하고 뻔한 묘사였지만 사실이 그랬다. 마을에서 저희들을 고깝게 보는 시선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으나 확실히 전보다는 나은 상황이었고, 어찌 되었든 자신은 로튼을 떠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만나면 불쾌한 존재가 몇 있었지만 말없이 슥 지나쳐 가는 정도였다. 비록 게리는 저를 볼 때마다 조용히 이를 드러내곤 했지마는. 
 가끔은 이 고요한 평화가 폭풍전야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키어런은 그저 이 순간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불명확한 미래를 걱정하기엔 시간이 아까웠으므로. 그는 사이먼과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아마 저는, 생각보다 더 많이 이 사람에게 마음을 준 듯했다. 그건 꽤 싫은 일은 아니라서, 키어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는 어느새 눈 몇 송이가 섞여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