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nother

[해준백기/대리백기] Trial

[해준백기/대리백기] Trial
 :시험

 #.
 장백기는 도무지 제 상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꽤 고급인력이라고 자부했고, 실제로도 그랬으며 그 하나를 위해 들인 땀과 열정도 만만찮았다. 인턴 경험을 몇 번이나 쌓았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나 열심히 공부했던 저였다. 독보적으로 눈부셨던 안영이를 제외하고는 분명 제가 차석임이 틀림없을 거였다.
 그런데 왜? 왜 나는 이렇게나 할 일 없이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 거지? 자격이 없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백기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럼에도 도무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원팀에 떨어져 철강팀에 배치되었다고, 그 어떤 것에 소홀한 적이 있었나?
그럴 리가 없었다. 어렵게 얻은 직장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신경을 썼고, 배웠던 모든 것들을 활용해 완벽을 추구하려고 했다. 저는 늘 최고가 되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자신은 낙하산으로 내리꽂힌 그 영업 3팀의 비실이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제가 하는 일이라곤 전화를 받거나 서류를 정리하거나, 정말 '잔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백기는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해준은 1분 1초마저 아깝다는 태도로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백기에게는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였다.

 해준은 제 옆에서 어린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는 백기를 흘긋 쳐다보았다. 입술을 달싹이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붙이며 저를 힐끔대는 꼴이 꼭 제게 무언가 할 말-아마 항의에 가까운 투정-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해준은 신경 쓰는 척하지 않았다. 그저 제 블루투스 헤드셋을 귓가에 바로 쓰며 모니터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 모습이 백기의 신경을 자극한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결국 백기는 의자가 덜컹 소리가 나도록 일어나고 말았다. 감정을 억눌러 잇새로 흘러 나온 말끝이 파르르 떨렸다.
 왜 저에게는 일을 맡기지 않느냐고. 도대체 왜 나를 싫어하시느냐고.
 용기를 내어 건넨 말이었다. 겨우 쏟아낸 말들 가득 억눌러왔던 자존심과 서러움이 슬금슬금 새어나와 한심해 보일 터였지만 그 질문에 후회는 없었다. 제 입술이 달달 떨리는 것을 백기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그 모습을 해준이 날카롭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선과 함께 이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그 서슬 퍼런 단호함으로 백기의 모든 것을 난도질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당신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기본이 없다'는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백기의 마음을 송곳처럼 후벼내었다. 자신은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아니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보다도 못한, 여물기도 전에 목이 잘려 떨어진 쭉정이라는 것을, 자신의 위치를 백기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장백기씨. 끝나고 일 있습니까? 없으면 저 좀 봅시다."

그리고 그 날은 해준이 처음으로 백기를 옥상으로 불러낸 날이었다.


 #. 
 백기는 서늘한 도시의 밤공기에 어쩐지 가슴 한켠이 무거워졌다. 답답한 일이 생길 때면 올라오던 옥상이건만, 어쩐지 지금은 그 높이가 저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것 같았다. 그는 강대리가 부담스러웠다. 그 감정을 읽기라도 한듯 해준은 그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장백기씨."

 백기는 제 이름 석자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나, 하고 침을 삼켰다. 피부 겉면에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이 달라붙는 것 같았다. 약간 무디기까지 한 그였지만 지금만은 불안감 가득한 제 직감이 맞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 강대리님."
 "장백기씨는, 그렇게 일이 하고 싶습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럼. 그렇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습니까?"
 "예...?"
 "제 말 안들립니까?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해준의 입가에는 약간의 조소까지 걸려있었다. 백기는 해준의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무슨 의미로 제 상사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백기는 제 좋은 머리를 빠르게 돌렸으나 나오는 것은 없었다. 결국 그는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각오를 묻는 것이라면, 대답은 반드시 '그렇다'였으니.

 "맡겨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게 어떤 일이라도요?"
 "....네. 시켜만 주십시오."
 "그럼 장백기씨. 제 앞에서 자위해보십시오."

 백기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거지? 농담이라기에 해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시리고 찼다. 비죽 올라간 입꼬리가 단호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못들으셨습니까? 제 앞에서, 자위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장백기씨.
해준은 소리없이 입만 벙긋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분명 진심이었다.
백기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손끝이 투명하게 저릿한 것 같기도 했다. 해준은 아주 느긋하게 그의 입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다. 무슨 대답이 나오든 지금보다는 즐거울 터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지금 장백기씨한테 바지를 벗고 그 손으로 직접 백기씨 물건을 세워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백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저의 기를 죽이려는 새로운 방법인가? 지금 자신은 성희롱을 당하고 있는 건가?
발밑에 끝을 알 수 없는 구멍이 뚫려 훅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강대리 특유의, 상대를 묘하게 긁어내리는 듯한 표정이 저를 거짓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전, 저는... 강대리님이 무슨 말을 하시는지 ㅈ,잘 모르겠습니다."
 "자위 한 번에 제대로 된 일감 하나."
 ".....예?"
 "꽤 좋은 제안이지 않습니까?"

 해준은 그에게서 눈을 돌려 그 끝을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건물들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입가엔 여전히 비딱한 미소를 띤 채였다. 이내 해준이 다시 백기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백기의 표정이 깨나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백기씨는 형편없습니다. 본인도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백기씨가 스스로 깨우치고 배우길 원했습니다만, 그게 마음에 안 든다면야. 왜 먼저 가르쳐주지 않았느냐고 물었던가요? 가르쳐 주겠습니다."

 해준은 피식, 하고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소문 따윈 내지 않습니다. 물론 촬영 같은 비열한 짓거리를 하지도 않고요. 그저, 장백기씨는 그 손으로 스스로 가는 모습을 제게 보여주면 되는 겁니다."

 백기는 감히 물을 수도 없었다. '당신 게이입니까?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따위의 말들은 패기 있게 제 상사에게 대들 때처럼 나오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적이 제 인생에 얼마나 있었더라? 답을 생각도 못 한 적이 있었던가? 이런 경험이, 있었던가? 백기는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아 울고 싶기까지 했다.
 도대체 자신은 무슨 잘못을 하였던가.

해준은 그런 그를 보며 짧게 혀끝을 찼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는 잘 닦인 구두를 문을 향해 한발 내디뎠다. 그 순간이었다.

 "....그거면. 그거면 됩니까?"

 아. 해준은 미소 지었다. 예, 그거면 됩니다. 말을 씹어 삼켜내며 해준은 빙글, 몸을 돌렸다.
 
 버릇없고 기본기 없는 신입은 예상보다 귀여울지도 몰랐다. 그리고 저는 이 옥상을 애용하게 되리라고, 해준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