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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백기/대리백기] Et ne nos inducas in tentationem

[해준백기/대리백기]et ne nos inducas in tentationem
 :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
 장백기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모태신앙이기도 했으나 그 자신이 아주 신실한 사람이기도 했다. 가끔씩 그의 머릿속엔 어쩌면 자신은 신부가 되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배우며 자랐고 그것이 당연한 것인줄만 알고 살아왔던 삶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더욱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 상사를, 저와 같은 성을 지닌 상사에게 커져가는 마음을 인정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힘이 들었다. 마치 모래구덩이 같은 감정은 그저 그 주위를 맴돌았을 뿐인데도 그를 잡아 끌어당겼다. 일부러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은 알량한 몸부림이었다. 성당의 문을 드나들 때마다, 성모상 앞에 인사를 드릴 때마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커다란 밧줄이 제 심장을 조이는 듯했다. 고해성사를 할 수도 없었다. 차마 인정하고 부르지도 못한 감정을 입 밖으로 쏟아내면 그 무게가 와르르 저를 덮칠 것만 같았다.

 백기는 해준을 바라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평생을 가져온 신앙이었고 저를 지탱해온 기둥이었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세계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그 스스로도 몰랐다. 고개를 돌려 해준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그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고, 입술을 달싹이며 '대리님'하고 부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을 뿐이었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진실이 해일처럼 그를 덮쳐오기 시작했을 무렵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백기는 기도했다.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끊어내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비웃기라도 하듯 기도의 내용이 점차 변해가는 것은 시리도록 선명했다. 매일 거르지 않던 묵주기도를 위해 제 묵주를 손에 쥐었을 때, 백기는 불현듯 제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이윽고 모아쥔 두 손 가득히 담은 기도가,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속삭임의 소리가 색을 덧입고 차올라 목구멍을 틀어막고서야 그는 겨우 감정의 끄트머리를 쥐었다. 뜨겁고 처연한 사랑이었다. 스스로 칼을 쥐고 상처를 내어 잔뜩 흉이 진 마음은 애틋하도록 커다랬다. 어루만지고 달랠 수도 없어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이 슬펐다.  

 백기는 그날 처음으로 사랑에 의해 울었다.

 묵주를 손에 쥐고 그는 달렸다. 숨이 차고, 애가 타들어 가도록 달려 도착한 곳은 성당이었다. 미사 시간을 한참 지나 달빛만 어스름히 화려한 색 유리를 비추는 그곳으로 백기는 떨리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투명한 고요함 사이로 그의 울음소리와 발자국 소리만이 울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휘청이며 그는 성전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는 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 밖에 없었다.


 
 #.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그는 흐느꼈다. 몇번이고 자신의 묵주를 손이 아릴 정도로 꽉 쥐며 기도했다.

 하느님, 제발, 어째서 저를 버리시나이까...
 제발, 제발... 저를 구원하소서.
 
 그는 계속해서 반복했다. 끊임없이 눈물 흘리고 새된 숨을 토해내며 용서해달라고, 저를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빌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울컥 미처 베어내지 못한 감정이 메아리쳤다. 저는 여기 있으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감히 십자가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자신은 죄인이었고 이단이었다. 흐르는 눈물조차도 부정하다는듯 파르르 떨리는 손이 처절하도록 창백했다. 묵주 끝에 매달린 십자가가 흔들렸다. 꿇어앉은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소리내어 쏟아내지도 못하는 죄악이 그의 목을 졸랐다. 

 아버지, 저를 내치실 바엔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그는 밤새도록 울었다. 버림받은 자신이 가여워 울었고 용서받지 못할 감정이 두려워 울었다. 그럼에도 깊어지기만 하는 마음이 안타까워 울었고 모진 사랑이 쓰라려 울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 서러워 그는 자꾸만 울었다. 

 그저 눌러담았던 감정은 어느새 흘러넘쳐 입술을 타고, 손끝을 타고 터져나왔다. 바라보기만 해도 아련한 사랑이었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 그가 있었고 가는 길의 끝마다 그가 있었다. 미워해본 적도 있었고 떠나려고 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엔 그럴 수 없었다.
'내일 봅시다.'
그 짧은 한 마디에 저는 잡히지도 않을 꿈을 꾸었다.
'장백기씨.'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저는 몸을 떨었다.

 그를 생각하며 몽정했을 때, 애써 무시하려 했다. 그의 이름을 되뇌며 자위했을 때에도 그저 억누르려 했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눈을 가린 결과는 참혹하도록 가슴 아팠다.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은 것만 같았다. 헐떡이는 숨의 끝에 차디찬 바람이 맺혔다.
 열이 올라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로 매달린 십자가가 저를 단죄하길 바라면서도 자신은 또한 성모상의 미소를 찾았다. 그 이율배반적인 꼴이 우스워 그는 울며 웃었다. 저는 신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를 지워낼 수도 없었다. 좁고 숨 막히는 상자에 갇혀 감전되기를 기다리는 고양이, 면회를 호출받은 사형수가 걷는 두 갈래 길처럼 끔찍하도록 잔인한 모순이었다. 
 하하, 한숨이 섞인 웃음을 뱉은 그는 미사보를 쥐어들었다. 여성에게만 허용된 얇은 천 조각이 가벼이 그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잔뜩 젖어든 뺨에 미사보를 드리우며 그는 숨을 참았다.

 용서받지 못할 사랑이라면, 아주 용서받지 못할 사랑이라면.
 하느님, 어째서 저를 여자로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천 하나 쓰는 것도 허락되지 않을 것을, 어째서 제게 이런 큰 짐을 지어주셨나이까.

얇은 천이 턱과 목덜미를 간질였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그날은, 백기가 마지막으로 성당에 발을 디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