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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스파스나] Fingers

[스파스나] Fingers
 :손가락

 그는, 스파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조심해서 장갑을 벗겨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가 다시 터졌기 때문이었다. 가죽장갑이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스파이의 입에서는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장갑이 반쯤 벗겨졌을 때, 그는 힘을 주어 그것을 한 번에 벗겨내었다. 드러난 그의 손가락은 한눈에 봐도 엉망이었다. 사실 엉망이라는 말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그 꼴은 처참했다. 덕지덕지 붙여진 밴드는 피에 절어 원래 색을 찾아볼 수 없었고, 새로 생긴 상처들은 차라리 양호해 보일 지경이었다. 으음, 스파이는 신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보는 상처였지만 여전히 통증에는 익숙해지기 힘든 까닭이었다. 칼을 잡아 단단한 사람의 가죽과 근육을 찢어놓고, 총의 반동을 견뎌내는 제 손에 허용치 이상의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손에는 언제나 상처가 가득했고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상처가 기실 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온몸에도 멍이며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붙었고 흐려졌다. 상처도 상처이거니와 피에 절어 무기가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착용하는 가죽 장갑도 문제였다. 그의 손에 맞게 늘어난 장갑은 강하게 상처를 짓눌렀고 전투가 끝날 때 즈음이면 잔뜩 부어오른 손 때문에 그것을 벗겨내는 것도 일이었다. 이 손이 사람 꼴이 되는 날은 제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스파이는 생각했다.
 아, 물에 닿으면 따가울 텐데.
상당히 어린애 같은 걱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스파이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샤워실로 향했다.

 메딕에게 치료를 받으면 이 정도는 금방 낫겠지만 스파이는 그 뺀질거리는 의사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 그가 느끼기에 메딕은 약간, 어쩌면 많이 시끄러웠고, 억지로 예의를 차릴 때를 제외하곤 언행에 교양이 없었으며, 그런 것을 제치고서라도 그는 아주 변태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면상을 조금만 참고 고통을 끝내볼까라고 중얼거린 스파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 손에 피가 절절 흐를지언정 메딕이 요상한 목소리로 웃어대며 치료비는 나중에 받아내겠다고 말하는 꼴은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젖어 물방울이 흐르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걱정했던 대로 물에 닿은 손가락은 굉장히 쓰라렸다. 

 담배를 태울 목적으로 제 흡연실에 방문한 스파이는 저 말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불을 켜지 않았지만 새어드는 달빛 덕분에 어스름한 창가에 서 있던 남자는 예상치 못하게도 스나이퍼였다. 그의 눈은 놀란 토끼같이 커져 있었다. 방에 들어온 사람이 스파이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이내 어깨의 힘을 풀었고,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스파이였다.

 "좋은 밤이지, 그렇지 않나?"

 스나이퍼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대신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온 것에 대해 눈에 띄게 어색해 하는 눈치였다. 정작 스파이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순전히 스나이퍼 자신의 가치관에 의한 반응이었다. 스파이는 난롯가의 1인용 소파로 발을 옮겼다. 붉은색을 띠는 소파는 그가 가장 아끼는 물건 중의 하나였다. 적당히 단단하고 적당히 푹신한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뉘이며 스파이는 품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냈다.

 "하나 피우겠나?"
 
 스나이퍼가 비흡연자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예의상 물었고 스나이퍼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어깨를 으쓱한 스파이는 불을 붙여 연기를 한 모금 들이쉬고는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는 그의 방문 이유를 물을 때였다. 스나이퍼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한 번 바라보곤 그를 향해 몸을 틀었다.

 "...자네 말처럼 좋은 밤이기에 들리고 싶었지. 어떤 모습이어도 이곳의 창문으로 바라보면 더 아름다우니까."

 스파이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스나이퍼는 대답했다.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스파이는 입을 다물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스나이퍼는 더 이상의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스파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룻바닥에 닿는 그의 발자국 소리가 넓은 방에 울려퍼졌다. 스파이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고 스나이퍼는 이내 그런 그의 앞에 섰다.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밤은 고요했고 둘의 시선은 녹아들듯 엉겨붙었다. 스나이퍼는 그의 눈 너머를 탐색하듯 응시하다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가장 먼저 눈길이 닿은 곳은 그의 손이었다.  

 "자네 손, 상당히 끔찍해 보이는군."
 "아아, 고질병이지."
 "치료라도 받지 그랬나."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그 의사양반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

 스파이는 씨익 웃어 보였다. 웃으라고 한 소리였으나 스나이퍼는 웃지 못했다. 작게 숨을 들이쉰 그는 조심스레 스파이의 손에 그의 손을 뻗었다. 스파이는 굳이 그런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느긋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곧 놀란 쪽은 스파이였다. 스나이퍼가 그의 발밑에 무릎을 꿇어 앉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가 물었으나 스나이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스파이의 손을 들어 천천히 제 입가로 가져다 대었다. 


 그것은 아주 느리고도 끈적하게 진행되는 행위였다. 그는 눈을 낮게 내리깔고는 스파이의 손가락에 키스했다. 손끝에, 손가락의 마디에, 손바닥에 닿아오는 그의 입술은 표면이 부르터 거칠었으나 아주 뜨거웠고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혀를 내밀어 손 곳곳을 핥아올리고, 손가락으로 그의 손의 도톰한 부분에 힘을 싣는 그 때문에 스파이는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스나이퍼는 제 이마를 간질이는 그의 숨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스파이의 눈에 꿉꿉하게 욕망이 들어차고 있었다. 그가 쥔 스파이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스나이퍼는 그의 손을 감싸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가해진 압력에 어설프게 딱지가 앉은 손가락의 상처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그는 스파이의 손을 고쳐잡았다. 새어나온 핏방울이 방울져 흘러내렸고 스나이퍼는 그것을 진득하게 핥았다.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그렇듯이 그의 손에서는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화약냄새가 났다. 스나이퍼는 그의 체취를 한껏 들이마시며 입을 벌려 그의 손가락을 물었다. 그리곤 혀를 둥글게 말아 손가락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스나이퍼의 입안은 뜨겁고 축축했으며 아주 좁았다. 스파이는 문득 그의 입이 제 것을 품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나이퍼가 그의 손가락을 깨물었기 때문이었다. 아...!, 스파이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스나이퍼는 미소를 지었으나 입안 가득 문 손가락 때문에 그의 눈이 어설프게 휘어졌을 뿐이었다. 스파이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약하게 그러쥐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려 그의 고개가 숙여졌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뼈를 바라보며 스나이퍼는 그의 손가락을 핥아 천천히 빼내었다. 미끈거리는 타액이 피와 섞여 길게 늘어졌고, 그의 손 곳곳에 키스한 스나이퍼는 흐른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혀로 훑었다. 그것은 행위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고, 그는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스파이는 그의 목덜미를 쥐어 힘껏 내렸다. 잇새로 새어나오는 그의 말엔 작은 으르렁거림이 섞여 있었다.

 "...꽤나 좋은 상처치료법을 아는군, 스나이퍼."
 "흔한 민간요법이지."
 "그래, 그리고 성공적인 유혹법이기도 하고."

 스파이는 허리를 숙여 그에게 키스했다. 메딕에게 찾아가지 않은 것은 참말 다행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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