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샹바레] Epicure
:미식가
속을 파낸 감자에 치즈를 채워넣는 손짓이 우아했다. 팔꿈치 부근까지 흉터가 가득한 손이지만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고 히카르도는 생각했다. 까미유의 치료를 받는 사람들은 아픈 줄도 몰랐을 거였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에 취해 멍해졌을 테니까. 꼭 지금의 자신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히카르도는 소파의 등받이에 고개를 젖혔다. 어느새 까미유는 감자요리를 오븐에 넣고 있었다.
"뭐라도 도와줄까."
"말을 꺼낼 타이밍이 굉장히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줘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과장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히카르도를 한 번 쏘아보고 까미유는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은 뒤 남은 일에 대해 생각했다.
감자는 순조롭게 오븐에서 익어가고 있었고 스테이크는 팬 위에서 멋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스파라거스와 토마토로 만든 샐러드는 발사믹 식초와 함께 플레이팅이 끝난 상태였고, 테이블 위에는 잘 닦인 커트러리가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감자와 스테이크를 접시에 옮겨 담는 일 뿐 이었다. 좀이 쑤셔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 기지개를 켜는 히카르도에게 제 눈앞의 식칼을 던질 것인가에 대해 짧게 고민한 까미유는 이내 해답을 찾아냈다.
"굳이 뭐라도 하고 싶다면 가져온 술이라도 꺼내놓는 건 어때?"
히카르도는 왼쪽 눈썹을 천천히 치켜세웠다. 입가엔 슬슬 비뚤어진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와인 글라스는 찬장의 왼쪽 상단에 있어."
움직이도록 해.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는 입이 벙긋이며 명령어를 전달하자 히카르도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일어섰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오랜 시간 앉아만 있는 것은 제 성미에 맞지 않았다. 긴 다리가 테이블의 다리며 의자 등을 치고 지나가자 까미유는 크게 한숨을 내 쉬고 싶은 것을 삼켰다.
"히카르도. 저녁도 못 먹고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진정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짜증을 내는 대신 함박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움켜쥔 까미유를 보며 히카르도는 손에 든 글라스와 와인병을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러다 그릇이라도 깨면 진심으로 죽여버릴 거라고 생각하며 까미유는 이내 그를 상대해주길 포기하고 오븐으로 눈을 돌렸다.
치즈가 녹아내리는 고소한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익히면 되겠군.
까미유는 마지막으로 감자를 확인하고는 팬을 향해 다가갔다. 뒤집어 양면을 적당히 익힌 스테이크에선 촉촉하게 육즙이 흘러내렸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까미유는 집게를 들어 스테이크를 접시에 옮겨담았다. 그리곤 미리 만들어두었던 레드와인 소스를 스테이크 위에 뿌렸다. 구운 버섯과 익힌 브로콜리로 접시를 장식한 뒤 까미유는 오븐에서 감자를 꺼내 그릇에 담고 조심스레 테이블로 옮겼다. 히카르도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까미유는 앞치마를 풀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그와 눈을 맞추며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즐거운 식사시간이야, 히카르도."
투박하지만 긴 손가락이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였다. 관절 마디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고기를 썰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손등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당장에라도 그 손끝을 입에 넣고 둥글게 핥아 맛을 보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까미유는 말했다.
"먹어봐, 맛이 어떤가."
반짝이는 그의 녹색 눈을 흘끗 바라본 히카르도는 작게 썬 스테이크를 입에 가져다 넣었다. 날카로운 이에 부드러운 고기가
찢겨나갔고 히카르도는 진심으로 칭찬했다.
"맛있군."
벌어졌다 다물리고 오물거리는 입술을 응시하며 까미유는 짜릿함에 발끝이 곱아드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을 것 같은데.'
까미유는 요리하는 것을 즐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리를 하고 남에게 대접하는 것을 즐겼다. 자신이 만든 요리를 상대방이 먹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처럼 묘한 전율이 일었다.
그는 요리를 대접하고 먹는 것이 일종의 '신뢰'를 표현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요리를 먹는 사람은 그 요리에 큰 의심을 품지 않는다. 제가 먹는 것에 무엇이 들어갔고 어떤 일이 벌어졌으리라고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까미유는 이 행동이 무의식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저는 요리에 장난을 치는 무례한 짓은 하지 않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람이 무언가를 먹는 행위도 어쩐지 음란한 구석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손가락을 움직여서, 입을 벌리고, 입을 닫아 턱을 움직이고, 목으로 넘기는 그 일련의 행위에는 섹슈얼함이 있었다. 마치 제 앞의 늘씬하고 거대한 짐승이 하고 있는 행위처럼.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히카르도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지만 히카르도는 눈빛에 욕망이 가득한 까미유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까미유?"
까미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잔을 들었다.
"우리의 평화로운 주말 저녁을 위해 건배."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까미유의 머리에서는 이미 히카르도가 완전히 벗겨져 신음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자신만 아는 즐거운 상상에 미소 지으며 까미유는 와인 글라스를 입에 댔다. 깊은 향이 나는 와인이 그의 혀를 타고 흘러갔다.
히카르도는 움직이는 그의 목울대를 바라보며 뒤늦게 와인을 한 모금 물었다.
서로의 시선이 얽혀드는 시간이 느리고도 정확하게 지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를 응시했고 먼저 정적을 깬 것은 히카르도였다.
"공들여 만들어 준 스테이크가 아까운데."
까미유는 입꼬리를 올리며 야하게 웃었다.
"내 스테이크는 식어도 맛있으니 걱정 마."
까미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부러 소리를 내 의자를 끌면서.
"일어나. 요리랑 다르게 뜨거울 때 맛봐야 좋은 내 좆을 삼키러 가야지."
"...구미가 당기는 소리군."
테이블은 쓸데없이 컸다. 히카르도는 보폭을 넓혀 빠르게 그에게 다가섰고 까미유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뜨거운 혀가 엉키고 타액이 흘렀다.
"혀놀림이 좋아졌는데. 뻣뻣하게 굳어있던 옛날이랑은 차원이 다른걸?"
"스승이 좋아서 그렇다 하도록 하지."
"맞는 말이네. 그럼 한 번 빨아봐. 이건 얼마나 나아졌는지 한 번 보게."
히카르도는 미소지었다.
"죽여주지."
버클을 푸는 손이 느긋했다. 도리어 급해진 것은 까미유였다.
"장난치지마, 발정난 암캐 주제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히카르도는 웃었다.
"급하면 될 일도 그르친다고 누누이 내게 훈계놓던 건 잘난 의사선생님 아니셨던가?"
까미유는 턱을 조금 앞으로 내밀어 이를 갈았다.
"내일 두 발로 걷고 싶지 않은가 보지?"
"천만의 말씀."
히카르도는 반쯤 선 까미유의 것을 둥글게 삼켰다.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까미유는 낮게 신음했다.
자신은 미식가였다. 그리고 제가 맛보고 있는 이 '것'은 제가 가장 공들인 메인디쉬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히카르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흐으... 아직, 교육이, 덜 된, 것 같은데?"
"그러는 선생님의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이는데?"
"닥치고 핥아. 뿌리까지 깨끗하게."
히카르도는 혀를 내밀어 그가 명령한 대로 핥았다. 단단하게 선 까미유의 것을 손에 쥐고 손톱으로 약하게 긁어내렸다.
까미유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일어서. 뒷입으로 먹게 해주지."
그리고 가장 공들인 메인디쉬는, 언제 맛봐도 질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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